7전 전패가 28세 박정환을 다시 일으켜세웠다…삼성화재배서 신진서 꺾은 '투혼'
6년연속 중국이 우승컵 가져간 삼성화재배서 한국에 7년만에 우승안겨
박정환이 3일 최종국을 두는 모습.[한국기원 제공]
[헤럴드경제=김성진 기자] 현재 세계최고의 프로바둑기사는 신진서(21) 9단이다. 한국랭킹 1위를 2년 넘게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공식이지만 고레이팅 랭킹에서도 한중일을 망라해 1위를 지키고 있다. 이런 신진서를 상대로 단판이 아닌 번기승부로 승리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3일 막을 내린 제26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에서 박정환(28) 9단이 신진서를 꺾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첫판을 내줬지만 내리 두판을 따내며 생애 첫 삼성화재배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 전까지 세계대회 16연승을 달리던 신진서였고 '올해 세계대회에서 한번도 지지 않겠다'고 공약했던 신진서였기에 박정환의 승리는 더 극적이었다.
박정환도 세계 톱3에 꼽히는 정상급 기사인만큼 우승이 이상할 건 없지만, 그와 신진서의 최근 대국결과를 돌아본다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7살 어린 신진서에게 1위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한국최고의 기사는 박정환이었다.
그런 박정환이 지난해 바둑인생에서 가장 처절한 고통을 맛봤다. 남해군이 마련한 ‘박정환-신진서 슈퍼매치 7번기’에서 7전전패를 당한 것. '누가 이겨도 4승3패, 잘해야 5승2패일 것'이라는 예상은 무참히 깨졌고, 바둑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최고의 기사들은 반집으로 한번만 패해도 내상이 큰 데, 그것도 같은 상대한테 7판을 내리졌을 때 그 심적 고통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 대회 직전 치러진 두 차례의 타이틀전에서도 5연패를 당했던 박정환은 신진서에게 6개월간 12연패를 당했다. 어지간한 기사라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트라우마가 되고도 남았다.
이런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세계정상에 올랐다는 점에서 박정환의 정신력은 놀랍기만 하다. 박정환은 3일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남해 7번기를 통해 신진서에게 많이 배웠고, 내 바둑의 문제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정환은 신진서와의 대국에서 유리하게 국면을 이끌다가도 조금씩 양보하다 후반에 뒤집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참아도 될 것 같은 순간 최강수를 던지면서 신진서와 정면대결을 택했다. 최종 3국에서 상변 백대마를 살아두면 편안하게 진행됐을 상황에서 중앙으로 뛰어나가 대마사활을 위협당하는 장면이 좋은 예다. 박정환은 “시간이 없었다면 살았겠지만 시간이 충분해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최강 신진서에게 차선의 수를 두어서는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남해 7번기 대국을 통해 느낀 것이다.
최근 바둑계에서는 24~26세면 절정에 오르고 이후에는 하향세에 접어든다고 본다. 이런 기준이라면 박정환은 최고 레벨의 경쟁대열에서 한발 밀려나는 것이 보통이다. 세계대회 3승을 거둔 중국의 탕웨이싱 9단이 이번 대국 도중 중국 사이트에서 해설을 하며 “26세가 넘은 기사는 전성기에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젊은 기사들이 잘해줘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중국 바둑팬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탕웨이싱은 박정환과 93년생 동갑이다. “박정환은 그 나이에 세계대회 우승을 하는데 무슨 소리”냐는 것이었다.
박정환의 가장 큰 강점은 엄청난 공부량이다. 모든 기사들이 열심히 공부하지만 박정화은 운동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머지 시간은 모두 공부와 대국에 쏟아붓는다. 알파고가 등장한 이후 바둑은 천재지변급 변화를 맞이했다. 인간의 두뇌로는 둘 수 없던 곳이 최고의 맥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포석이 바뀌었고, 전투가 바뀌었다. AI를 공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역대 최고의 기사였던 이창호 기사도 마흔이 넘었지만 AI를 공부하며 다시 강해지고 있다.
신진서는 인공지능이 예상하는 최고의 자리(블루 스팟)를 가장 많이 두는 기사라 '신공지능'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박정환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엄청난 연구를 통해 신진서가 구사한 신수(新手)를 무력화시키는 모습이 이번 최종국에서 만천하에 공개돼 감탄을 자아냈다.
바둑 최강국을 자처하는 중국의 바둑팬들은 이번 박정환의 승리를 보며 '나이가 많다고 바둑을 못 두는게 아니라 (중국 선수들이) 노력이 부족한 것', '중국 기사들은 박정환을 보고 배워라. 수없이 꺾여도 굴복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는가'라며 극찬했다.
완벽한 인공지능 스타일 바둑도 연구하면 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박정환은 이제 세계대회 5승을 기록하게 됐다. 이창호(17승) 이세돌(14승) 조훈현(9승) 유창혁(6승)이어 한국선수 역대 5위다. 10대 후반에서 20대초반의 내로라하는 기사들 사이에서 28세 박정환이 얼마나 더 많은 명국을 남길 수 있을지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대국을 통해 박정환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편 삼성화재배 역시 박정환의 우승으로 큰 전기를 맞은 셈이다. 6년 연속 중국이 우승하는 동안 '삼성이 대회를 없애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바둑계에서는 흘러나왔다. 큰 돈 들여 남 좋은 일만 할 필요있느냐는 회의적인 시선도 강해졌다. 하지만 최근 한국기사들의 선전이 이어지며 삼성화재배라는 전통깊은 대회는 다시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을 전망이다. 박정환도 우승 이후 “한국선수들이 계속 지는데도 계속 대회를 후원해준 삼성화재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기사제공
헤럴드경제
김성진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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